[기획 인터뷰] 《여전히 유효한 어떤 기억들》의 이유주혜 작가를 만나다.

[기획 인터뷰] 초고속 AI 시대, 손바느질로 엮은 치유의 회화론

글로컬 openARTs실험실 기획전 《여전히 유효한 어떤 기억들》의 이유주혜 작가를 만나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캔버스를 대신하고 알고리즘이 일상을 지배하는 초고속 디지털 시대다. 모든 것이 무한 복제되고 순식간에 휘발되는 이 눈부신 문명의 한복판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느리고 원초적인 ‘손바느질’을 통해 시대와 인간성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예술가가 있다.

부산 금정구 장전동에 위치한 복합문화예술공간 MERGE?(오픈아츠스페이스 머지)에서 7월 11일(토)부터 개최되는 글로컬 openARTs실험실 기획전, 이유주혜 개인전 《여전히 유효한 어떤 기억들》의 주인공이다.

이유주혜 작가는 현대 소비사회가 낳은 대표적인 부산물이자 쉽게 버려지는 '비닐 포장지'를 주재료로 삼는다. 상업적 로고와 화려한 텍스트로 박제되었던 차가운 비닐들은 작가의 손끝에서 무작위로 해체되고 분절된다. 본래의 자본주의적 맥락을 상실한 비닐 조각들은 합성 펠트 천과 캔버스 위에서 겹겹이 쌓이고, 작가의 집요한 '손 박음질'을 거치며 독창적인 시각적 회화 언어로 재탄생한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되는 2026년 신작들은 작가가 통과해 온 깊은 시간의 밀도를 고스란히 증명한다. 거대한 섬유 예술(Fiber Art)로 구현된 <혼돈 Turmoil>과 <별의 먼지 Stardust>, 그리고 9개의 분할된 캔버스를 유기적으로 조합해 내면의 서사를 입체화한 <창자 Intestine>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비닐과 실이라는 이질적인 매체를 통해 단순한 시각적 쾌감을 넘어선 치유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작가의 바느질은 단순한 기법이나 시대를 역행하는 무모한 몸짓이 아니다. 그것은 구석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류 고유의 원초적 행위이자, 파편화된 현대인의 기억을 태고의 지혜에 묶어두는 '단단한 닻'이다.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손바느질의 선형적 궤적은 일상의 피로에 지친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를 건넨다.

오는 7월 19일, 스페인의 다원예술가 루시아 카옌(Lucía Callén)과의 장르 초월적 클로징 협업 퍼포먼스를 앞두고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머지(MERGE?) 전시실에서 이유주혜 작가를 만나 비닐 팔레트 위에 꿰매어 올린 그의 예술과 삶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Q1. 안녕하세요, 이유주혜 작가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실과 바늘, 그리고 폐비닐 등을 이어 붙이며 조형 작업을 하는 이유주혜입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 식물, 동물과 공생하며 자연스러운 존재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아날로그 시대에 나고 자란 사람이기도 합니다.

대학에서는 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며 시각적 조형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살아가면서 굳이 붓과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더라도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저에게 주어진 일상의 재료들로 작업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털실로 뜨개 조각을 만들며 작업을 시작했고, 요즘은 비닐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콜라주 작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Q2. 이번 개인전 《여전히 유효한 어떤 기억들》은 어떤 전시인가요? 전시 제목에 담긴 의미도 궁금합니다.

A. 제목에 쓰인 ‘유효한’이라는 표현에 ‘살아 있는’이라는 뜻을 담고 싶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이라는 개념을 전제하지요. 굳이 인위적으로 살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있는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것들에 늘 흥미를 느낍니다.

우리 마음속의 기억들도 그렇지 않을까요? 잊혔던 예전 기억들이 문득 생생하게 다가올 때, 마치 그 순간에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비록 그 기억들이 각자의 마음속에서 무수한 다른 기억들과 중첩되고 재조합된 ‘추억’일지라도 말이죠.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 속 이미지들이 정확히 어떤 특정한 기억을 지칭하진 않습니다. 그저 제 마음 깊은 곳에 묵혀 두었던 감정들이 뭉쳐져 나온 결과물들입니다.

또한, 비닐을 꿰매는 손바느질 방식 역시 우리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익혀온 기술로서 ‘여전히 살아 있는(유효한)’ 것입니다. 흐릿하고 모호하던 기억 조각들이 얇은 실로 꿰매어지면서 점점 단단한 결속을 이루고, 어느새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한 바느질 땀이 가진 놀라운 생명력이라고 생각합니다.

 

Q3. 평소 작가님의 작업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A. 평소에 의미 없는 선 드로잉, 즉 낙서를 많이 합니다. 그 낙서들을 뒤적이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추상적인 구성이나 덩어리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비닐 콜라주 작업을 시작할 때 화면을 구성하는 원형이 됩니다. 물론 이미지를 그대로 베끼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비닐 조각들을 배열하며 화면 안에서 새로이 균형을 찾아갑니다.

조각들을 잇는 주된 방법은 ‘손 박음질’입니다. 단순히 접합하는 목적이라면 접착제나 재봉틀로 충분하겠지만, 저에게 손바느질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핵심 과정입니다. 기계적이지 않은 손바느질은 화면 위에 독특한 질감과 선형적 궤적을 남기며, 그 자체로 중요한 조형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작업의 진정한 완성은 ‘작품의 제목이 정해질 때’입니다. 작업하는 긴 시간 동안 저와 작품이 치열하게 주고받은 실랑이 속에서 길어 올린 감정의 단어들을 조합해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래서 관람객분들께는 제목과 이미지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지나간 작업 과정을 정리하는 중요한 시간이자 무척 재미있는 유희입니다.

Q4. 비닐에 그려진 화려한 글씨나 로고를 과감하게 자르고 겹쳐서 원래 모양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드신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A. 포장지 위에 인쇄된 텍스트나 익숙한 로고들은 강력한 의미 전달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제가 의도치 않은 의미가 관람객에게 전달될 수 있어요. 저는 화면 위에서 ‘꼬깔콘’이나 ‘오뚜기’ 같은 특정 상품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웃음)

저는 비닐 위의 색감, 폰트, 문자 블록 그 자체에 주목합니다. 색감별로 잘라내 파편화된 조각들을 임의로 뒤섞으며 시각적 간섭을 만들고, 새로운 색 덩어리가 되도록 합니다. 수없이 겹쳐지는 과정에서 원래의 맥락은 사라지고, 오직 주변과 어우러지며 톤이 조절된 ‘색채’로서의 역할만 남게 됩니다. 상황이 바뀌면 원래의 의미는 지워지고 새롭게 부여된 역할에 충실해지는 것이죠.

 

Q5. 비닐포장지를 '탐나는 물감 팔레트'로 바라보시는 시선이 매우 신선합니다. 주로 어떤 비닐들에 매력을 느끼시나요?

A. 제가 사용하는 비닐 포장지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나물을 싸주는 검은 비닐봉지부터 커피믹스 봉투, 과자 봉지까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입니다. 각각의 비닐들은 두께, 질감, 화학적 성분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자르고 다림질하며 재가공하는 과정에서 저마다 다채로운 성질을 뿜어냅니다.

물감 튜브에서 원색을 그대로 짜서 쓰지 않듯, 다양한 성질의 포장지 조각들을 2차, 3차로 재가공하며 저만의 물감 팔레트를 만드는 과정이 참 재미있습니다. 우연히 형성된 독특한 질감이나 깊이 있는 색감의 조각들을 모으면서, 앞으로 그려낼 새로운 화면을 상상할 때 무척 즐겁습니다. 그런 설레는 감정을 저는 ‘마음속 작은 소요’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Q6. 작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A. 처음에는 제 스스로를 ‘작가’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조차 어색했습니다. '나는 그저 즐겁게 살고자 할 뿐인데, 과연 이 행위가 작가라는 무거운 호칭에 걸맞을까?' 자문하곤 했죠. 하지만 작가(作家)라는 단어의 본뜻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 만드는 사람'이더군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는 호칭을 조금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만들었지만, 어느새 작업들이 스스로 생명력을 얻고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이 자생력을 가진 작업들이 어디까지 살아나갈 수 있을지 저 또한 무척 궁금합니다. 그 생명력이 유지되는 동안, 식물에 물을 주고 밥을 먹이듯 부지런히 손과 마음을 쓰며 작업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Q7. 마지막으로, 디지털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작가님의 작품을 보며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가지고 돌아가기를 바라시나요?

A. 저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 대한 이해가 그리 깊지 못합니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은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세상의 감각을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디지털 감각을 탑재한 현대인들이 버무려 내놓을 기억의 잔상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곤 합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축적된 유효한 기억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저마다의 아름다운 모양으로 현현(顯現)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사 안내] 클로징 퍼포먼스 안내

이번 전시의 대미를 장식할 특별한 클로징 퍼포먼스도 마련된다. 본 퍼포먼스에는 현대 부토(Butoh)를 기반으로 신경과학과 시각예술을 융합한 이른바 '시냅틱 부토(Synaptic Butoh)'를 연구하는 스페인 출신의 퍼포먼스 아티스트 루시아 카옌(Lucía Callén) 작가가 참여한다.

루시아 카옌 작가는 이유주혜 작가와의 온라인 협업을 통해 제작된 특별한 코스튬을 착용하고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이번 공연은 회전과 나선형의 움직임, 그리고 점진적인 변형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몸이 서서히 열리고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기억과 자연의 순환, 그리고 생명력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복합문화예술공간 MERGE? 측은 시각과 청각, 신체적 감각을 아우르는 오픈아츠(openARTs)의 진수를 보여줄 이번 클로징 행사에 문화예술계와 관람객들의 많은 관심이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버려진 비닐 조각이 단단한 실을 통해 생명력을 얻듯, 여러분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여전히 유효한 기억'을 깨워보시는 것은 어떨까? 전시 기간중 MERGE?의 예술 실험실을 방문해보길 권한다.

전시 기간: 2026. 07. 11. (Sat) - 07. 20. (Mon)

클로징 퍼포먼스 일시: 2026. 07. 19. (SUN) 5PM

장소: 복합문화예술공간MERGE?

작성 2026.07.12 14:08 수정 2026.07.1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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